2021년 11월 16일(화) - 충청권 성지 순례 3일 차
어제 저녁 서산 처제네 전원주택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하룻밤 신세를 졌다.
09:30 경에 작별 인사를 하고 3일차 성지 순례 길에 나섰다.
이름모를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의 터전인 해미 순교 성지가 오늘의 첫 순례지이다.
차를 주차하고 제일 먼저 마주친 생명의 나무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2014.8.14-18)을 기념하는 조형물로 교황 방문기간 동안 교황이 남긴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나무에 새겼다. 생명의 나무 열매는 교황의 메시지인 사랑, 희망, 소통, 협력, 존중, 평등을 종으로 제작하여 메세지의 울림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2020년 11월 29일 대림 제1주일에 ‘해미순교성지’가 교황청이 승인한 '국제 성지'로 선포되었다.
생매장 구덩이 근처에 건립하기 때문에 구덩이를 상징하는 원형의 성전을 세우고, 진복팔단을 말씀하신 주님을 상징하는 팔각 모양의 탑으로 파수대를 표현하고 있다.
소성당 (1층)
대성당 (2층)
해미 순교 성지 기념관은 성지에서 발굴된 유해들을 왕릉의 형태를 본따 지붕을 만들고 그 안에 모신 곳이다. 유해참배실과 생매장 순교를 이해 할 수 있는 그림과 조형물로 꾸며져 있다.
해미 순교 성지 기념관 앞의 시복기념비와 부조물
1백 년의 박해 기간 동안 단 한 차례도 그 서슬이 무뎌지지 않았던 해미는 수천 명의 이름 모를 순교자들이 웅덩이와 구덩이로 내몰린 채 생매장 당한 곳이다. 이렇게 쓰러져 간 순교자들은 그 수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누가 어떻게 죽었는지 정확히 알 길이 없다. 다만 수천 명으로 추정되는 순교자들 중 132명은 이름과 출신지를 남기고 있으나 그나마도 불확실하고 나머지는 이름 석 자조차 남기지 못한 무명 순교자들이다.
순교자들을 형벌하던 석조물들
진둠벙(죄인둠벙).
팔을 묶여 끌려오는 신자들을 거꾸로 떨어뜨려서 둠벙(논 한가운데 물을 저장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웅덩이) 속에 쳐박혀 죽게 했다.
무명 생매장 순교자들의 묘가 해미 순교탑 앞에 조성되어 있다.
인언민(마르티노), 이보현(프란치스코), 김진후(비오) 순교자 상이 한가운데 자리한 야외 미사장
야외 미사장 주변에 설치된 십자가의 길
소규모 야외 미사장
유적지는 현재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으나, 옛날 '예수 마리아'를 애타게 부르는 교우들의 기도 소리를 '여수머리'라 알아듣던 주민들의 입을 통해 '여숫골'이라는 지명으로 전해오고 있다.
해미 지역 첫 순교자 인언민(마르티노)의 말이 새겨진 입석
'그렇구 말구.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천주님께 바치는 거이'
성모자상
이름 없는 집
순례자들이 이름 없는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되새기기 위하여 '성경 이어쓰기'를 하는 곳으로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해미 순교 성지를 나와 해미 읍성으로 향했다.
체포된 신자들은 1차로 해미 읍성 안에 있는 관아에서 형벌을 받고 감옥에 갇혔다.
신자들을 매달아 형벌을 가하던 회화나무가 남아있고 감옥도 복원되어 있다.
오래 전에 이곳이 순교 지역인지 모르고 다녀왔던 곳 해미. 그때는 해미 읍성을 자유롭게 산책하며 즐겼던 기억이 난다.
이 지역에서 조선시대 박해 기간 동안 감옥은 잡혀 온 교우들로 가득했고, 매일 끌려 나와 교수형참수, 몰매질, 석형, 백지사형, 동사형 등으로 죽어 갔다. 또 더욱 잔인하게 돌다리 위에서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돌에 메어치는 자리개질이 고안되기도 했고, 여러 명을 눕혀 두고 돌기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죽이기도 했다. 해미 진영은 신앙을 증거하며 순교한 이들이 넘쳐났던 곳이다.
박해시대의 역사를 알고 이 지역을 둘러보니 당시의 끔찍한 탄압이 피부로 느껴지는 듯 하다.
목숨으로 신앙을 대변한 신앙 선조들이 있었기에 현재 우리의 평화로운 신앙생활이 보장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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