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2일(화) -남파랑길 7차 여행 제 3일차

남해군 서면의 중현보건소 앞에서 남파랑길 46코스를 출발했다.  회룡마을을 지나 언덕길을 넘어가니 중현마을이 나타난다.

 

조선시대 학자 정희보(호 당곡)를 모신 사당 운곡사.  정희보는 남해 출신으로 뛰어난 학문과 글솜씨로 유명하여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내렸지만, 이를 거절하고 평생을 학문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운곡사 앞 밭에 노부부가 봄농사 준비를 하고 있다. 3월 중순임에도 남쪽 해안지방은 벌써 로타리도 치고 밭이랑 정리도 끝난 상태로 일부 밭에는 파종까지 끝난 것 같다.

 

마을길을 벗어난 남파랑길은 사학산 숲길로 들어선다.

 

사학산을 넘은 남파랑길은 선원마을로 내려온다.

 

선원마을을 지켜온 당산나무가 주민들에게 쉼터를 제공하고 있다.

 

남해대로 밑 굴다리를 지나 고현읍내로 들어선다.

 

남해군의 '분사 남해 대장도감'에서 많은 대장경이 판각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고현면에 대장경판각문화센터가 건립되어 주민들에게 판각체험 강좌를 개설하고 있단다.

 

고현읍내를 지나 다시 남해대로 밑으로 빠져 나온 남파랑길은 대사천을 따라간다.

 

대사천변에 세워진 안내판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반야심경'의 마지막 주문 구절이란다.

팔만대장경 중 '대반야바라밀다경'은 600권, 15,028면의 방대한 분량이다. 그 중 핵심인 '대반야바라밀다심경(약칭 반야심경)'은 260자 경판 한 장으로 이루어 있지만 팔만대장경의 정수이다.

81,258장의 팔만대장경은 분사남해대장도감에서 판각하여 강화 대장경 판당에 보관되었다가 선원사를 거쳐 조선 태조 7년(1398년)  5월에 해인사로 옮겼다.

 

대사천과 남서대로 사이 도로공원 포토존.  액자 안의 돌탑들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남파랑길 46코스는 물이 빠져 갯벌이 드러난 바닷가를 지나 이순신순국공원을 향한다.

 

역사공원이자 문화공원인 이순신바다공원은 남해군 관음포 일대 약 9만㎡에 달하는 드넓은 부지에 2017년에 문을 열었다.

이순신장군의 동상이 있는 호국광장은 노량해전 당시의 모습을 4천여 장의 분청 도자기에 그려낸 초대형 벽화인 ‘순국의 벽’이 있다. 

 

노량해전은 1598년 11월(선조 31년) 정유재란 당시 노량 앞바다에서 이순신장군을 포함한 조명 연합수군이 철군하던 왜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이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7년 전쟁을 끝낸 전투이다. 바다에서의 마지막 싸움이며 이순신장군이 전사한 해전이다.

이순신장군은 관음포로 도주하는 마지막 왜군을 추격하던 중 총탄을 맞고 쓰러지면서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愼勿言我死)'라는 말을 남기고 전사하였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장군의 유해가 육지로 올라와 노량 충렬사까지 운구되었던 길이  '이순신 호국길'로 조성되어 있다.

 

이순신 호국길을 따라가다 보면 멀리 노량대교가 보인다.

 

감암마을을 지나 노량대교 밑으로 지나는 남파랑길

 

노량대교 뒤로 남해대교가 보인다.

 

남파랑길 46코스는 원래 남해대교를 건너게 되어 있지만 남해대교 보수 관계로 통제가 되어 길을 돌아 노량대교로 바다를 건너 육지로 들어선다.

 

하동군 금남면의 노량항에서 남파랑길 46코스를 마감한다.

 

경남 사천군에서 삼천포대교를 넘으며  남해군으로 들어온 남파랑길 36코스가 46코스에서 남해군을 벗어났다. 꽤나 긴 여정이었다. 남해섬을 한바퀴 돌아 다시 육지에 발을 디뎠다.

하동군의 노량항에서 30여분을 달려 남해 서면의 숙소로 돌아왔다. 

 

오늘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뜻깊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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