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3일(금)
한양도성길 흥인지문 구간에 이어 계속 남산(목멱산) 구간으로 Go!!!!!
장충체육관옆 한양도성길이 성 안쪽 길과 성 바깥 쪽길 두 가지로 나누어져 있다.
잠시 망설이다가 일단 안쪽 길을 선택해서 올라갔다.
성 안쪽길을 따라 올라가다 뒤를 돌아보니 성밖으로 시내가 보인다.
소나무가 오랜세월 굽이굽이 자란 모습으로 성곽을 지키고 있다.
성 안쪽 길은 신라호텔과 성곽과의 경계선을 따라간다. 신라호텔 안의 팔각정이 울타리 너머로 보인다.
한참을 오르니 성 바깥 쪽 길로 나갈 수 있는 좁은 문이 보인다.
조선시대 축성시부터 있던 문인지, 근래에 성곽 정비사업 때 만들어 놓은 문인지 --------
쪽문을 통해 성 바깥 쪽 길로 나갔다.
성 바깥으로 나와 보니 성이 제법 높음을 알 수 있다.
장충체육관 뒷길의 평지부의 석성은 대부분 세종 때 새로 쌓은 것이라는데,
옥수수알 모양으로 다듬은 돌을 사용했으며. 상대적으로 큰 돌을 아랫부분에 놓아 균형을 유지했단다.
이 구간의 성벽은 경상도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쌓았단다.
옛부터 자리를 잡고 있던 돌과 근래에 얹어진 돌들이 서로 어우러져 있다.
두 돌은 형님과 아우로서 서로 상견례를 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아우 돌은 형님 돌로부터 오랜 세월의 이야기를 지금도 전해듣고 있을 것이다.
성이 끝나는 부분에서 다시 안쪽 길로 들어가 성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데크로 잘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가다보니 한남대로가 내려다 보인다.
남산 공원으로 들어서기 전 횡단보도에서 바라다 본 국립극장
남산(목멱산) 공원에 들어서니 한양도성이 다시 나를 반긴다.
데크로 잘 만들어진 계단길은 언제나 산을 오르는 나를 꽤나 힘들게 한다.
잠시 쉬며 뒤를 돌아보니 아래로 남산순환도로가 보인다.
중장비도 없는 그 옛날에 이 높은 산까지 저 돌들을 어찌 날라와 축성을 했을까?
수많은 백성들의 오랜 세월 피와 땀으로 쌓아올리지 않았을까?
태조 시기의 성벽은 축성된 지 이미 600여 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초축 당시의 모습을 유지한 성벽이 상당 부분 남아 있다. 특히 남산의 동쪽 능선을 따라 조성된 나무계단길 옆에 태조 때 성벽이 길게 이어져 있다.
가파른 데크 계단을 다 오르니 국립극장과 신라호텔 등 시내의 모습이 시원하게 보인다.
오늘 미세먼지가 좀 약했더라면 멋진 모습을 볼 수 있었을텐데-----
숲 사이로 남산의 서울타워가 보인다.
시민들의 건강 증진을 위한 쉼터도 잘 꾸며져 있다.
남산 위의 성곽 길을 따라 서울타워쪽으로 올라간다.
주차장과 편의점이 있는 곳에서 바라다 본 남산 성의 모습
성 안 쪽에서 볼 때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성 밖에서 보면 꽤나 높게 느껴진다.
그래야 외부에서 처들어 오는 적들을 성 안쪽에서 어려움 없이 방어할 수 있었겠지.
남산 팔각정으로 올라가는 길 옆에는 봄을 맞아 튜울립 싹이 돋아나고 있다.
드디어 남산의 정상에 올랐다.
팔각정 앞 광장에는 민속놀이 체험장이 꾸며지고 있었다.
남산 팔각정 자리는 조선시대 국사당(國師堂)이 있던 자리이다.
조선 태조는 남산을 목멱대왕으로 삼고 이 산에서는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는 국가 제사만 지낼 수 있게 하였다.
일제 강점기 시대 1925년 일제가 남산에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인왕산 기슭에 옮겨졌다.
제1공화국 때에 원 국사당 자리에 탑골공원 팔각정과 같은 모양의 정자를 짓고,
이승만 대통령의 호를 따 ‘우남정’이라고 하였는데, 4·19 혁명 이후 팔각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단다.
팔각정 바로 뒤편에 이어져 있는 성곽의 모습
성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자리에 있었건만, 전에 왔을 때는 관심 부족으로 이런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목멱산 봉수대터(木覓山烽燧臺址)는 남산 정상에 있던 목멱산(木覓山) 봉수대터이다.
남산봉수대는 서울에 있다 하여 일명 경봉수(京烽燧)라고 하며, 조선시대 전국 각지의 봉수를 매일 받아 병조(兵曹)에 보고하는 중앙 봉수소였다.
세종 5년(1423년)에 설치되어 갑오경장(1895년) 때까지 500년간존속하였으나,
지금의 봉수대터는 1993년 추정하여 복원한 것이란다. 서울시 기념물 제 14호
정상에서 내려오면서 만난 성곽 위에 세월의 흔적인 이끼가 길게 덮혀있다.
봉수대 아래 케이블카 입구에는
연인들이 자신들의 영원한 사랑을 기원하는 사랑의 자물쇠가 많이 걸려있다.
저 많은 자물쇠의 주인공들이 사랑의 약속을 잘 지키고 있을까?
미세먼지로 뿌옇게 흐린 서울의 하늘로 인해 북한산 자락은 전혀 보이지도 않는다.
우리나라 하늘이 언제부터 이렇게 망가졌는지? 최근 몇년간 부쩍 심해진 느낌이다.
한참을 내려오다 올려다 본 성곽과 돌계단길
남산 서쪽 봉우리는 누에머리를 닮았다하여 예부터 잠두봉이라 불렀단다.
잠두봉 포토 아일랜드에서 바라다 본 서울 시내의 모습
이어지는 돌계단을 내려오자니 가금은 좀 쉬어야 한다.
잠시 쉬는 동안 뒤를 돌아보니 N서울타워가 숲 뒤로 보인다.
안중근의사 기념관과 돌에 새겨진 안의사의 애국지심이 서려있는 글들
國家安危 勞心焦思(국가안위 노심초사) -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
志士仁人 殺身成仁(지사인인 살신성인) - 뜻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은 내몸을 바쳐 대업을 이룬다.
合成酸敗 萬古定理(합성산패 만고정리) - 합하면 이루고 흩어지면 패한다. 이는 만고의 정한 이치다.
見利思義 見危授命(견리사의 견위수명) -
이익을 보거든 의리에 맞는 지 생각하고, 위태함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안중근(安重根)[1879~1910]이 1910년 3월 26일 사형에 처해질 때까지 여순감옥에서 휘호한 유묵(遺墨) 200여 점 가운데 하나인 보물 제569-6호「안중근의사 유묵」-
見利思義 見危授命은 폭 30.6㎝, 길이 140.8㎝의 족자로, 한지에 8자의 글자가 세로로 휘호되어 있다.
유묵의 말미에는 “1910년 3월에 여순 감옥에서 대한국인 안중근이 쓰다[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라는 글씨와 함께 장인이 찍혀 있다.
남산의 백범광장 주변에는 항일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기념물이 많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신궁이 있던 곳으로,
일제 식민지배의 상징을 항일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대체한 것이다.
광장 일대의 한양도성은 일제강점기 조선신궁을 지을 때 철거되거나 흙 속에 묻혔다가 최근 다시 쌓았단다.
백범 김구 선생 동상과 성재 이시영 선생 동상
장충체육관에서 남산 백범광장까지의 남산(목멱산) 구간은 4.2km
서울에 살면서 참 드물게 가보는 곳이 남산인 것 같다. 내 기억으로 남산에 오른 것이 서너번?
자동차나 케이블카를 이용해 올랐던 남산!
난생 처음 두 다리로 남산의 역사적 의미를 생각하며 종주를 한 것 같다.
남산에 한양 땅을 지키기 위한 성터가 많이 있었다는 사실(史實)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한양도성길을 걷지 않았다면 내가 그렇게 오래 살았던 서울의 남산을 진면목을 모르고 지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시대에 남산의 정기를 뿌리채 봅기 위해
우리선조들의 문화유산인 국사당과 성터까지 파헤치고 신궁까지 설치했던 일본.
백범 김구 선생이 온 세상을 향해 '이 땅이 대한민국 땅임을 선포하노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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