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23일(월) - 서해랑길 27차 여행 제 2일 차            

법성버스정류장에서 시작한 서해랑길 39코스는 우리가 머물고 있는 호텔을 지나 진성마을로 향한다.

 

진성마을 언덕에 자리한 '법성포 철비'

조선 철종 4년(1853년)에 세운 법선 진 홍대항 첨사(수군 첨절제사)위 철제 선정비다. 홍 첨사는 갑오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철종 2년에 법성 첨사로 부임하였는데 2년여 재임기간 동안 선정을 베풀었단다. 이제까지 입석에 새겨진 선정비를 보아온 때문인지 철로 제작된 선정비가 좀 낯설게 느껴진다.

 

법성포 철비를 지나 마을을 벗어난 서해랑길은 법성진숲쟁이로 들어선다.

 

'숲쟁이’란 숲정이의 사투리로 마을이나 도시 근처에 특별한 목적으로 조성된 숲을 뜻한단다. 또한 ‘쟁이’란 재, 즉 성(城)을 의미하는 어휘로도 쓰여 ‘숲쟁이’는 숲으로 된 성을 말하기도 한다.  느티나무 사이로 이어진 데크길을 따라 정상에 오르니 법성포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법성진성은 국방상 중요한 포구인 법성창을 방어하기 위해 조선 중종 9년 (1514) 인의산에 높이 4m, 둘레 약 1.5km 규모로 만들어진 석성이다. 성 아래쪽에 법성진성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법성사 담벼락의 벽화가 길게 이어져 있다.

 

법성은 불교의 전래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백제시대 불교가 처음 전해질 때 법성포구를 통해 들어왔다고 한다. 인도의 고승 마라난타 존자가 실크로드와 중국 동진을 거쳐 백제 침류왕 원년(384)에 해로를 통해 우리나라에 최초로 입국한 곳이 바로 법성포다. 법성포의 백제시대 지명은 아무포(阿無浦)였다. 이것은 마라난타가 아미타불 정토신앙을 전래한 포구라는 것에서 연유했으며, 그 후 성인이 성스러운 법을 전한 포구라는 뜻의 법성포(法聖浦)로 다시 바뀌게 된 것이라 한다.

 

백제불교최초도래지 안에 있는 탑원은 불탑과 감실형 불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감실형 불당은 불상과 소탑을 봉안하는 감실이다.

 

 

백제불교최초도래지 간다라 유물관은 대승불교문화의 본 고장인 파키스 간다라의 2-5C 경의 불전도 부조 및 불상 등 진품유물이 전시되어 간다라 불교 문화예술의 특징요소를 살펴볼 수 있다, 유물관 건축양식도 간다라 건축 요소를 담아내고 있다

 

백제불교최초도래지에 있는 마라난타사는 스님이 거주하지 않는 곳으로 우리나라에 최초로 불교가 전래된 것을 기념하는 건물이다. 우리나라 전통양식의 건물과 간다라의 건축양식이 혼재되어 낯설은 느낌이다.

 

백제불교최초도래지를 나와 영광대교로 향한다.

 

대교를 넘어 백수해안도로에서 바라본 영광대교가 멋진 자태를 뽐내고 있다.

 

해안가 산책로를 따라가다 작은 포구를 지나 언덕 위로 오르니 멋진 풍광을 즐길 수 있는 전망대가 우리를 맞는다. 백수해안도로의 절경이 이어진다.

 

백수해안도로와 나란히 가는 해안산책로에 아름다운 전설이 깃들여져 있는  '노을종'이 있다. 경건한 마음으로 3번의 타종을 하며 마음의 평화를 기원해보았다. 노을의 종을 한번 치고 맥놀이를 들으면 웃을 일이 생기고, 두 번 치고 맥놀이를 만지면 사랑의 감정이 찾아들고,  세 번 치고 맥놀이를 느끼면 행복한 일이 생긴다고 한다.

 

아주 먼 옛날 도움소도에는 병든 어머니를 모시고 소금을 팔아 살아가는 젊은이가 있었다. 매일 무거운 소금가마를 지고 나가 팔다가 노을이 내릴 무렵에야 녹초가 되어 집으로 들아 오곤 했다.  그린데도 아픈 어머니 앞에서는 힘든 내색 한 번을 하지 않는 착한 아들이었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이 안쓰럽고 걱정 돼 매일 아들이 오가는 길목에 서서 아들을 기다렸다. 그 때마다 아들은 노을을 등에 지고 환하게 웃으며 돌아왔다.

비바람이 심한 어느 날, 아들은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소금가마를 지고 길을 나섰다.  그러나 굵은 빗줄기에 소금은 모두 녹아버리고, 팔 것이 없어진 아들은 다른 방편으로 어머니의 약 값을 마련하느라 며칠을 더 바깥에서 머물게 되었다. 이 같은 상황을 알 길 없는 어머니는 아무리 기다려도 아들이 돌아오지 않자 급기야 찾아 나서기에 이른다. 하지만 얼마 못가 바위에 걸려 넘어지고, 어머니는 넘어진 그대로 돌처럼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며칠 후 아들은 약을 가득 담은 노란 함지박을 지게에 싣고 돌아오다 길가에 쓰러진 어머니를 발견하고 다급하게 뛰어갔다. 노란 함지박은 이미 뒷전이었다. “어머니, 제가 왔어요." 아들은 몇 날 며칠을 어머니 곁에서 구슬프게 울다 바람처럼 사라졌다.

이후 사람들은 해 질 녘이면 아들이 붉은 노을을 등에 지고 어머니 곁으로 온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어머니가 걸려 넘어진 바위를 궁굴 바위,어머니 바위를 할미여, 노란 함지박이 떨어진 자리에 생긴 바위를 노랑여라고 불렀다.

 

노을종을 지나 산책로를 따라가니 노을전시관이 나타난다. 전시관 앞마당에는 이곳 영광 출신 가수 조미미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조미미는 '바다가 육지라면'으로 유명한 1970년대 트로트 가수이다.

 

노을전시관 앞 바다에 대신등대가 멋진 풍광을 만들어내고 있다. 잠시 해안선을 따라 내려오니 영광 스카이워크가 멋진 모습을 뽐내고 있다. 

 

서해랑길은 구수산 등산로로 들어선다. 통행인이 별로 없어 잡초가 등산로를 차지하고 있다. 우린 해안도로를 따라 우회하기로 했다. 해안도로를 따라가던 중 언덕 위 전망이 좋은 카페에서 고구마 라떼와 망고 스무디로 목을 축이며 여유를 즐겼다.

 

오늘의 최종목적지인 백수해안도로 종점에 도착.

 

전남 영광의 과거 역사를 돌아본 하루였던 것 같다.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도래지를 돌아본 것이 가장 머리에 남는다. 물론 백수해안도로의 멋진 풍광들도 좋았지만-----.

 

법성포의 숙소로 돌아와 하루를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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