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3일(화)


서울에 일이 있어 머무는 중에 하루 틈이 나 한양도성길 인왕산 구간을 찾았다.

집 앞에서 370번 버스를 타고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하차

강북 삼성병원 정문에 설치된 한양도성 스탬프를 찍고 언덕길로 올랐다.


예전에 내가 다니던 시절의 모습하고는 완연히 다르게 변한 도로가 약간은 나를 당황하게 만든다.

삼성병원 건너편엔 돈의문박물관 마을이 들어섰다.

아마도 관광객들의 한옥 체험을 위한 마을을 조성하고 있는 것 같다.

돈의문박물관 마을이 완공되면 외국인들에게는 꽤나 인기있는 지역이 될 듯 하다.

 


1422년부터 1915년까지 현 위치에 있던 돈의문(敦義門) - 우리는 흔히 서대문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돈의문이 있던 자리에 표식만이 남아있다.


돈의문은 태조 때 처음 세워졌으나

태종 13년(1413)에 만들어진 서전문(西箭門)이 서대문의 기능을 대신하였다고.

세종 4년(1422)에 도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면서 새로운 돈의문을 세웠는데 현재 돈의문 터가 그 위치이다. 이후 돈의문은 새문 또는 신문(新門)으로도 불렸으며, 현재의 신문로라는 지명도 이에서 유래되었다고.

1915년 일제는 서대문을 지나는 전차를 개통하면서 이 문을 해체하여 건축자재로 매각하였다고 한다.

조선의 근대화란 미명하에 우리의 문화재를 파괴하고 팔아먹은 일본인들!

자신의 나라 근대화 작업 중에도 이런 만행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울시교육청으로 올라가는 송월길에도 좌우의 상가가 철거되고 새로 단장을 해 놓았다.

왼쪽엔 아파트 단지가 들어왔고, 오른쪽은 도로공원으로 가꾸어져 있다.

 


서울시교육청 건물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서울시교육청을 지나 송월길을 계속 오르니 오른쪽으로 한양도성이 나타난다.

 


행촌 성곽마을 잔디밭의 민들레가 오가는 이에게 봄 인사를 한다.

 


근래에 보수 축성된 한양도성 뒤로 아파트가 내려다 보인다.

 


한양도성 안쪽으로 마을사람들이 다듬어 놓은 화단이 도성과 함께 이어져 있다.

 


인왕산(仁王山) 입구에 산등성을 따라 올라가는 한양도성이 보인다.

인왕산은 한양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본래 서산(西山)이라고 했다고 한다.

세종임금 때 조선 왕조를 수호하기 위해 인왕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인왕은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역사를 달리 부르는 말이란다.

배불숭유의 정책을 편 조선이지만 불교의 힘을 빌려 왕조를 수호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잘 포장된 도성길을 따라 올라가니 산수유꽃이 나를 반긴다.

 


인왕산 정상을 향해 굽이쳐 올라가는 한양도성

봄을 맞은 노란 개나리꽃이 한양도성의 모습을 아름답게 꾸미고 있다.

 


인왕산 정상을 향해 이어지는 한양도성

숨이 차 잠시 쉬며 뒤돌아 본 한양도성이 서울시내의 모습과 어우러져 굽이쳐 내려간다.

 


한양도성과 돌계단과 소나무 3총사가 아름다운 풍경을 그려낸다.

 


날씨가 흐려 선명하지는 못하지만 청와대 쪽 시내의 모습이 내려다 보인다.

 


수줍은 시골 처녀의 붉은 보조개를 연상케 하는 진달래가 멋진 풍경을 선사한다.

솔숲 사이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식혀준다.

 


큰 바위 사이로 한양도성길은 이어지고

 


해발 338m인 인왕산은 큰 화강암 덩어리들로 이루어진 바위산으로 정상에 가까울수록 험준하다.

이런 지형적 특성 때문에 경사가 급한 곳에서는 자연 암반이 성벽 역할을 대신하기도 한다.

큰 바위들과 어우러져 끊어질 듯 이어진 성벽은 한양도성의 빼어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저 건너 산봉우리에는 서울을 지키는 군사기지가 눈에 보인다.

 


인왕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서울시내의 모습

날씨가 좋으면 정말 멋진 서울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텐데-----

 


인왕산 정상에서 창의문쪽으로 내려오는 길에 보이는 기차바위의 모습

 


한양도성 인왕, 백악 구간 성벽 보수공사 안내판

이 높은 산에서 무거운 돌과 씨름하며 한양도성을 복구하는 이들의 노고에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땀 흘린 이들 덕분에 복구된 한양도성이 데크 길과 나란히 산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

 


조선시대 축성된 한양도성이 오랜 세월의 흐름을 색깔로 표현하고 있다.



옛부터 있던 성과 오늘날 쌓은 성이 확연하게 구분이 된다.



창의문 쪽으로 이어지는 한양도성 옆으로 군인들이 쳐놓은 철책선이 나란히 간다.



옛 성곽과 근래에 보수한 성곽의 차이

옛날에 쌓은 성은 돌 하나하나를 틈에 맞게 조각해 끼워맞췄다면

근래에 쌓은 성은 직사각형의 돌을 단순히 위로 얹어놓은 듯 한 모습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 둘 중 어느 것이 더 튼튼하게 버티고 있을까?



무릎에서 잠시 쉬어가라는 신호가 온다.

오늘 인왕산 코스가 약 4km이지만 완전한 등산 코스(?)로 꽤나 가파르다는 생각이 든다.

잠시 쉬며 내가 내려온 길을 올려다 보니 숲 사이의 한양도성의 모습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큰 길가에 가까워지니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보인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가 큰 바위에 암각되어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길가에는 윤동주 문학관도 자리를 잡고 있다.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인 창의문이 보인다.



한양도성의 화단에는 봄을 알리는 제비꽃이 등산객의 피로를 씻어주려는 듯 미소를 보낸다.



창의문 앞 길가에 1·21 사태로 순직한 최규식 총경 동상이 목련꽃과 함께 서 있다.

1968년 1월 21일 북한의 특수부대 소속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기 위해 서울에 침투했을 당시

종로경찰서장이던 최규식 총경은 북한군과 교전 중 창의문에서 순직하였다.

이 사건 이후 백악과 인왕산에는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었는데,

1994년에는 한양도성의 인왕산 구간이, 2007년에는 백악 구간이 각각 다시 개방되었다.





돈의문터에서 창의문까지의 인왕산 구간은 4km



인왕산 구간은 난이도 상급코스로 가파른 산길을 오르고 내리느라 꽤 많은 땀을 흘렸다.

조그만 배낭 하나 메고 오르내리기도 이리 힘이 드는데

그 옛날 중장비도 없던 시절에 이곳에 한양도성을 건설했다니 정말 대단하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백성들의 피와 땀이 서려있는 곳일 것이다.

바위산과 어우러진 한양도성은 현재를 사는 나에게는 아름다운 우리의 문화유산으로 보인다.


만약에 서울에 강도 높은 지진이 일어난다면

조선시대 쌓은 성은 큰 피해가 없겠지만, 근래에 쌓은 성은 지진을 피해가기 어려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한양도성을 유심히 살펴보면 옛날에 오랜 세월 작업은 했겠지만

돌 하나하나를 짜맞쳐 끼워놓은 듯한 모습이다. 웬만한 지진에는 끄떡없을 듯.


한양도성은 평균 높이 약 5~8m로 전체 길이가 약 18.6km란다.

또한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전 세계 도성 중 가장 오랫동안(1396~1910, 514년) 도성기능을 수행하였단다.    
역사적으로나 자연과의 조화로 볼 때 우리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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