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5일(수)  성탄절

 

오후에 아파트를 나서서 절두산 순교 성지를 찾았다.

성탄절 오후 여유있는 시간에 성지를 순레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 하다.

서울에 살면서도 마음 뿐이었던 절두산 성지.  처음 방문하니 뭔가 숙연해지는 듯 하다.

 

합정역에서 절두산 성지로 올라가는 길

 

 

 

계단을 오르니 예수님께서 환한 웃음으로 우리를 반겨주신다.

 

 

 

본당으로 가는 길가의 항아리

우리 선조들이 박해를 피해 깊은 산골에서 옹기를 구우며 공동체를 이룬 것을 상징하는 것일까?

 

 

 

성녀 마더 데레사의 흉상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동상

 

교황은 1984년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한국 103위 순교자 시성식을 집전하였다.

1989년 10월 제44차 세계성체대회를 맞아 다시 한국을 찾은 그는 65만여 명이 운집한 여의도광장에서

남북한의 화해를 바라는 평화 메시지를 낭독했고, 5.18 광주 민중항쟁의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성심상 앞에서 자세를 낮춰 올려다 보아야 예수 성심상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절두산 성지에서 처형된 첫 순교자 가족상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동상

김대건 신부님의 유해가 이곳 절두산 순교성지에 모셔져 있다.

 

 

 

김대건 신부 동상에서 올려다 본 절두산 성지 성당

 

 

 

십자가의 길

 

 

 

한강을 등지고 앉은 김대건 신부 동상

방한모를 써서 얼른 보면 중국인같은 느낌이 든다.

 

 

 

1871년 흥선대원군이 서양인을 배척하기 위하여 세운 척화비.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 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

우리의 만대자손에게 경고하노라.'

 

 

 

성모동산에 봉헌된 촛불이 성탄절을 맞아 더욱 환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

 

 

 

본당으로 올라가는 출입문

옛 선조들이 형틀에 묶여 신앙을 증거하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 한 것 같다.

 

 

 

절두산(切頭山) 세 글자가 음각되어 있는 입석

 

절두산은 예로부터 가을두(加乙頭), 잠두봉(蠶頭峰), 용두봉(龍頭峰) 등으로 불리어 왔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을 통과해 서울 근교까지 침범해 오자

대원군은 서양 오랑캐들로 더렵혀진 한강을 천주교인들의 피로 씻겠다며

이곳에서 수많은 교인들의 목을 잘라 죽이는데(병인박해)

그때부터 이곳의 지명을 절두산(切頭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1966년에 세워진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관

기념관에는 성당을 비롯하여 27위 순교 성인과 무명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진 성인 유해실, 그리고 박물관이 있다.

 

 

 

성당 앞에 있는 순교자 조형물 

 

 

 

성당과 이어져있는 한국천주교 순교자박물관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선종 10주년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추기경 수단

추기경은 교황에게 가장 가까운 협력자이면서 교황의 관료라고도 할 수 있다.

교회를 위해 기꺼이 피를 흘리고 목숨까지 내놓기 때문에 교회에 대한 헌신의 표시로 붉은 가두리 장식을 한다.

 

 

 

성당 안의 모습

 

 

 

제대

 

 

 

성탄 구유

 

 

 

순례 스탬프를 찍기 위해 들어간 교육관 안의 성모님.

 

 

 

주차장쪽으로 내려가 보니 절두산 순교자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기념탑 하단부에는 순교하신 성인들이 조각되어 있다.

 

 

 

한강가로 내려가 올려다본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 성당

 

 

 

절두산 순교성지를 돌아보고 서강대학교 안에 있는 노고산 성지를 찾아갔다.

 

 

 

노고산 성지는 천주교 박해가 시작된 이후,

사형을 당하고 그대로 형장에 내버려진 순교자들의 시신을

신자들이 목숨을 걸고 관가의 눈을 피해 모셨던 곳 가운데 하나로,

여러 처형장과 가까워 많은 순교자들이 임시로 매장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고

세명의 외국인 사제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가 9월 21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이들의 시신은 사흘 동안 버려져 있다가 한강변 모래톱에 묻혔다.

그 뒤 20일 가량 지나서 7-8명의 신자가

죽음을 무릅쓰고 감시의 눈을 피해 시신을 거두어 노고산에 매장하였다.

4년 뒤 관악산 줄기 삼성산에 유해를 이장하였고,

그 뒤 다시 이장하여 1901년부터 명동 대성당  지하 묘소에 모셔져 있다.

 

 

 

서강대학교는 순교자들의 숭고한 정신을 받들고자 2009년 가브리엘관 앞에 순교 현양비를 봉헌하였다.

 

 

 

서강대학교 안의 성탄 구유

 

 

 

 

오늘은 즐거운 성탄절.    Merry Christmas!!!

성탄절에 천주교 성지를 돌아 볼 기회를 가지게 된 것도 하나의 은총이 아닐까?

정말 뜻있게 하루를 보낸 것 같다.

 

참으로 영광스러운 순교자들이여,

저희도 그 영광을 생각하며 기뻐하나이다.

간절히 청하오니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 빌어 주시어

저희와 친척과 은인들에게

필요한 은혜를 주소서

('한국 순교자들에게 바치는 기도'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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