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8일(토)

미리내 성지는 신유박해(1801년)과 기유박해(1839녀) 때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들어 옹기를 굽고 화전을 일구어 살았던 곳이다.

골짜기를 따라 흐르는 실개천 주위에,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와 점점이 흩어져 살던 천주 교우들의 집에서 흘러나온 호롱불빛과 밤하늘의 별빛이 맑은 시냇물과 어우러져 보석처럼 비추이고, 그것이 마치 밤하늘 별들이 성군(星群)을 이룬 은하수처럼 보여 미리내(은하수의 순 우리말)라고 불리게 되었다.

 

성지 입구에서 예수님이 두 팔 벌려 오는 이들을 반갑게 맞아 주신다.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면서 묵주의 기도를 올릴 수 있도록 조형물이 이어져 있다.

 

 <한국순교자 79위 시복 기념경당>이 1928년 9월  ‘순교자의 모후경당’ 으로 봉헌 되었으며, 기념경당 안에는 김대건 신부의 유해(발 뼈)와 성인의 시신이 담겨져 있던 목관 일부분을 안치하고 있다. 

 

사제가 되어 이 땅에 돌아온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46년 9월 16일 만25세의 나이로 극히 짧은 사목 활동을 마치고는 형장의 이슬이 되어 한 점 흠결 없이 순교하였다. 국사범으로 형을 받은 죄수는 통상 사흘 뒤에 연고자가 찾아 가는 것이 관례였으나, 김대건 신부의 경우는 참수된 자리에 시신을 파묻고 파수 경비를 두어 지키게 했다.
교우촌 어른들의 걱정과 격려를 받은 17세의 미리내 청년 이민식 빈첸시오는 파수군졸의 눈을 피해 김대건 신부님 치명한 지 40일이 지난 1846년 10월26일, 몇 몇 교우들과 시신을 한강 새남터 백사장에서 빼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시신을 가슴에 안고 등에 지고, 험한 산길로 1백50여리 길을 밤에만 걸어서 닷새째 되는 날인 10월 30일 자신의 고향 선산이 있는 미리내에 도착하여 신부님을 무사히 안장시킬 수 있었다.

김대건 신부 묘역을 아침저녁으로 보살피던 이민식은 그로부터 7년 후, 제 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가 선종하자, ‘거룩한 순교자의 곁에 있고 싶다.’는 주교의 유언을 따른 교회의 결정으로 그를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묘소의 옆자리에 안장하였다.
아들이 치명한 지 18년이 지난 1864년 5월17일,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 고 우르술라도 비극적인 처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남편 김제준 이냐시오와 대역죄인 아들 신부를 천주께 보내고, 이집 저집 문전걸식을 하다시피 한 실로 눈물겨운 생애였다. 이민식은 고 우르술라 어머니도 김대건 신부의 묘소 옆에 나란히 모셔 생전에 함께 있지 못한 모자간의 한을 위로하였다. 미리내의 오늘을 있게 한 당사자인 이민식 빈첸시오 자신도 92세에 세상을 뜨니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 묘역 곁에 묻히게 되었다.

 

묘소 앞쪽에 있는 '순교자의 모후 성모상'은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안은 어머니의 모성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순교자의 모후 경당에서 내려오는 길에 성모당이 있다.

 

성지 중앙에 1991년 봉헌된 '한국순교자 103위 시성 기념성당'이 자리잡고 있다.

 

한국순교자 103위 시성 기념성당 지하에는 순교 장면과 형구 모형 전시장이 있다.

 

십자가의 길

 

 

주차장 오른쪽 언덕 위에 위치한 1906년에 건립된 미리내 성 요셉 성당

 

김대건 신부가 1846년 순교하기 전 스승과 동료 신부에게 보낸 옥중 서한

“저는 그리스도의 힘을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형벌을 끝까지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느님, 우리의 환난을 굽어보소서. 주님께서 만일 우리의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님! 누가 감히 (이를) 감당할 수 있으리이까?
지극히 사랑하는 나의 형제 최양업 토마스여! 잘 있게.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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