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8일(금)

의정부 교구의 성지를 돌아보기로 했다.

아파트에서 강북 강변로를 달려 10:40경에 도착한 행주 성당은 의정부 교구 내에 세워진 최초의 성당이다.

1899년 약현 성당의 공소로 출발한 행주 성당은 한옥 목조 성당이다. (등록 문화재 제455호)

 

성모 승천을 주보로 모신 행주 성당은 로마에 있는 성모 마리아 대성당과 특별한 영적 유대로 결합되어, 교황청으로부터 성모 순례지로 지정받아 정해진 날 순례자는 전대사 특전을 받을 수 있는 곳이다.

 

 

행주 성당에서 파주시 탄현면에 있는 참회와 속죄의 성당에 도착하니 11:30 경

참회와 속죄의 성당은 한반도의 평화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고 교육하는 공간을 마련하자는 김수환 추기경의 제안으로 2008년에 완공되었다. '참회와 속죄'라는 성당의 이름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우리 자신의 참회와 속죄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성당의 외형은 평안북도 신의주 진사동 성당, 내부는 함경남도 덕원의 베네딕도 수도원의 한국 전쟁 이전의 모습을 각각 그대로 재현하였다.

 

제대 위쪽 유리 모자이크는 남한과 북한 지역의 순교자들이 평화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그리스도왕께 한반도의 평화와 일치를 한목소리로 전구하는 내용이다.

 

제대 좌측 벽면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2014년에 완공된 민족화해센터

 

성당 좌측의 평화의 문을 통해 지하로 내려가면 본안당이 있다. 6년전에 우리 곁을 떠나 이곳에 계신 모임 선배님을 위해 주모경을 받쳤다.

 

 

참회와 속죄의 성당을 출발해 양주시 남면의 신암리 성당을 찾아갔다.

이곳은 오래된 교우촌으로 하느님의 종 이춘근 라우렌시오 신부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이 신부님은 서울교구 사제로 서품 받은 뒤에 베네딕도 수도회에 입회하였고, 1950년 10월 평양에서 순교하였다.

1907년 송도(개성) 성당 공소로 설립되었으며, 한국 전쟁 때 폭격으로 초토화 되기도 했다. 현재의 성당은 2007년에 공소 설립 100주년 기념 성전을 신축 봉헌한 것이다.

 

성당 잔디밭의 한복을 입으신 성모님의 흉상.  흉상의 성모님은 처음 보는 것 같ㅌ다.

 

 

신암리 성당에서 20여 분을 달려 도착한 파주시 법원읍의 갈곡리 성당.

갈곡리는 칡이 많아 칡의 계곡(갈곡, 葛谷)으로 불렸고, 우리말로 칡울이라 하여 공소 이름도 '칡울 공소'라 불렸다. 1896년 세 가족이 이곳으로 와 옹기를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며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1936년 지은 공소 강당이 한국 전쟁으로 소실된 뒤, 미 해병대 군종 신부의 도움으로 1955년 현재 성당을 건립하였다.

 

하느님의 종 김치호 베네딕토 신부(한국인 최초 수도 사제. 1950년 순교)와 그의 누이 김정숙 마리안나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950년 순교)가 태어나고 자란 곳으로, 유서 깊은 신앙촌답게 최창무 안드레아 대주교를 비롯한 많은 사제와 수도자를 배출하였다.

 

독특한 형태의 십자가의 길이 성당을 감싸고 있다.

 

 

갈곡리 성당에서 양주시 양주동의 양주 순교 성지로 갔다.

가건물과 천막으로 이루어진 본당이 있는 양주 순교 성지는 현재 성역화가 진행되고 있는 곳

'치명일기'의 기록을 통해 병인박해 때 5명이 순교한 치명지를 찾아내어, 2016년 성지 선포 미사를 봉헌하고 성역화를 시작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1866년에 김윤호 요한과 권 마르타 부부, 김 마리아, 박서방이, 1868년에는 홍성원 아우구스티노가 순교하였다.

 

성모님께 촛불을 봉헌.

 

철 구조물로 제작한 십자가의 길

 

양주 순교 성지 주변에는 양주 향교와 복원된 양주 관아, 국가 무형 문화재 제2호인 양주 별산대 놀이 전수 교육관이 자리하고 있다.

 

 

양주 순교 성지에서 양주시 장흥면에 있는 성 남종상 요한과 가족 묘소를 찾아갔다.

T-map에서 '성 남종상 요한 묘'를 입력하면 '천주교 길음동교회 묘원'으로 안내가 된다. 길음동 성당 묘원 안으로 들어가 맨 위쪽으로 올라가면 성 남종상 요한 가족 묘소가 있다.

 

1968년 성인의 손자 남상철이 가족 묘역으로 조성한 가족묘역에는 부친 남상교(아우구스티노)와 어머니 이조이(필로메나)의 묘, 성 남종상(요한)의 묘와 동생 남규희의 묘가 있다.

남종상 성인은 '승지'라는 직책으로 103위 성인 가운데 가장 높은 벼슬에 올랐던 분이다. 그러나 당시 공직이 신앙생활을 하는 데 방해가 되자, 그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관직을 버렸다.

1863년 말경 러시아가 수시로 우리나라를 침범하며 통상을 요구하자, 남종삼은 서양 프랑스 세력을 이용해 러시아를 물리치자는 '이이제이방아책(以夷制夷防俄策)'을 건의 하였다. 이에 대원군은 주교와 만남을 시도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고, 정치적 상황이 바뀌며 1866년 2월 천주교를 탄압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남종삼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고 향년 50세로 순교하였다.

남종삼의 시신은 박순집에 의해 용산 왜고개에 매장되었다가, 1909년 유해가 발굴되어 명동 성당에 안치되었고, 시복을 계기로 1967년 10월 다시 절두산 순교 성지 유해실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이때 성인의 유해 일부를 가족 묘소인 장흥면 울대리에 모셔 안장하였다. 2018년 9월에 성인의 새묘비를 세우고 축복하였다.

 

가족 묘역에 서니 맞은 편에 북한산 국립공원이 보인다.

 

천주교 길음동교회 묘원에서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면 성 남종상(요한) 묘역으로 올라갈 수 있다.

몸이 불편한 분은 십자가의 길이 끝나는 곳까지 차를 갖고 갈 수도 있으나, 길이 좁고 험하니 운동삼아 걸어가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성 남종삼 요한 가족 묘소에서 양주시 장흥면의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를 찾아갔다.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는 16세의 어린 나이로 급제하여 정조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천주교의 오묘한 진리에 깊이 매료되어 입교하였고, 그 후 출세의 길을 마다하고 고난과 박해만이 기다리는 신앙의 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가다가 1801년 순교하였다. 부인 정난주 마리아는 제주 대정현에 관노로 유배를 갔고, 외아들 황경한은 추자도에 남겨져 선종하였다. 황사영이 신유박해의 상황과 대비책을 적어 북경 주교에게 보내려고 준비했던 '백서'는 젊은 학자의 용기있는 표현이며 귀중한 교회사 자료이다.

황사영의 묘는 180년 동안 찾지 못하다가 1980년 후손들과 학자들이 현재의 묘를 발견하여 묘역이 조성되었다.

 

황사영 알렉시오는 순교자라는 종교적인 입장에서 보면 머리 숙여 경의를 표하지만, 한 가족의 가장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참 안스럽게 느껴진다. 본인의 신앙을 증거하다 부인과 자식과 생이별의 아픔을 겪어야 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으니-----.

 

황사영 순교자의 묘에서 오늘의 마지막 순례지인 의정부 주교좌 성당으로 향했다.

2004년 의정부 교구가 설립되면서 주교좌로 지정된 성당

성당 입구 정면에 있는 사적지 성당은 1953년 미군 군종 신부의 도움으로 봉헌되었다. (경기도 문화재 자료 제99호)    이 건물은 의정부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옛 성전 뒤쪽에 2003년 봉헌된 새 성전이 있다는데 들어가 보지를 못했다.

사적지 성당 안에 들어서니 수녀님 한분이 기도를 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고 나오려는데 '신발 신으면 안 되요.'라는 수녀님 말씀. 성전 안에는 신을 벗고 들어와야 한단다. 죄송하고 당황스럽고 '죄송합니다'만 반복하고 나와서 보니 입구 바닥에 신을 벗으라는 안내문이 있다. 들어갈 때 보지 못한 잘못!

오늘의 의정부 교구 순례는 경거망동으로 물거품이 되는가? 너그러우신 주님, 이 죄인을 용서하소서!!!!

 

의정부  교구의 성지를 순례한 날!

의정부 교구 성지 중 남양주시에 있는 마재 성가정 성지는 다음 기회에 순례를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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