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6일(화)
13:20경에 도착한 예산군 대흥면 대흥 봉수산 순교 성지
대흥은 1801년 신유박해 때 김정득 베드로 복자가 신앙을 증언하고 순교한 마을이다.
김정득 복자는 예산에서 순교한 김광옥 안드레아 복자와 함께 '의좋은 순교자'로 알려져 있다. 두 순교자는 서로 고향은 달랐으나, 공주 무성산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다가 신유박해 때 체포되었다. 그들은 예산, 홍주, 청주를 거쳐 한양까지 이송되었으며, 여러 차례 모진 형벌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봉수산 성지 옆에는 대흥 관아, 의좋은 형제 효제비, 대흥 옥, 조리돌림 하던 저잣거리, 순교한 참수 터 등을 재현한
순교자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는데, 가보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대흥 봉수산 순교 성지 입구
성지 중앙의 성모상을 받치고 있는 돌에는 참수대(斬首臺)라 씌여져 있다. 사형을 집행했던 참수대를 형상화 한 것이다. 성모님은 순교자들이 죽는 그 순간까지 순교의 동반자였다.
대흥 관아의 옥사인 대흥 형옥원을 재현해 놓았다
형옥원은 죄인들을 가두고 형벌을 가하던 감옥으로 옥사에는 3개의 방이 있고, 그 안에는 죄인들이 목에 차는 칼과 곤장을 칠 때 사용했을 형구들이 놓여 있다
'내일 정오,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
한양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돌아오던 길, 복자 김정득 베드로와 김광옥 안드레아는 각자의 처형지인 대흥과 예산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에서 손을 맞잡고 이렇게 인사했다고 한다.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러운 상태였지만, 두 형제의 얼굴은 더없이 즐거운 얼굴이었다고 전해진다. 마침내 의좋은 순교자, 김정득과 김광옥 형제는 1801년 8월 25일 각각 대흥과 예산의 처형지에서 한 날 한 시에 참수로 순교하였다.
성지에 조성된 십자가의 길
성지에는 가건물 형태의 본당이 세워져 있고, 지금도 성지를 계속 조성하고 있다.
대흥 봉수산 순교 성지를 떠나 예당 저수지가 바라다 보이는 음식점에서 보리밥 정식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배나드리 성지로 향했다.
배나드리는 예산군 삽교읍 동남쪽 삽교천 가에 위치한 마을로 도리(島里)라고 불렸는데, 바다로 통하는 삽교천에 밀물 때면 사방에 물이 차 섬이 되어 배를 타고 다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박해의 영향으로 1817년 10월 배나드리에서 20~30명 가량의 신자들이 체포되었는데, 그중 민첨지 베드로와 형수 안나, 송첨지 요셉, 손연욱 요셉, 민숙간 등은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 김옥에서 순교하였다.
배나드리 인근에서 순교한 인언민 마르티노 복자는 1737년 충청도 덕산 주래(삽교읍 용동리)에서 태어나 황사영 알렉시오에게 천주교 신앙을 배우고, 주문모 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재산을 버리고 공주로 이주하여 살다가 1797년 정사박해때 공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해미로 이송되어 1800년 1월 9일 63세로 순교하였다.
순교자 인언민 마르티노의 마지막 말씀. '그렇구 말구.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천주님께 바치는 거야.'
인언민 마르티노 복자는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이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복을 누리시기를 기도한다.
주여! 순교자들을 위하여 기도드리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