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7일(금)
서울 아파트에서 출발해 이승훈 베드로 묘 입구에 도착하니 10:30이 좀 지났다. 장수사거리에서 인천 남동정수장 경계 울타리를 따라 들어가다 여유있는 공간에 차를 세워두고 안내판을 따라 갔다.
정수장 철담 옆길에서 갈라지는 오솔길부터 십자가의 길이 묘역까지 이어진다.
우리나라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베드로)은 1756년에 태어나 24세 젊은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단념하고 서학 연구에 매진하였다. 마재에 살던 정씨 가문 정약용의 누이동생과 결혼하여 정씨 가문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1784년 북경으로 건너가 프랑스 그라몽 신부로부터 교리를 이수하고, 베드로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고 한국(조선)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다.
영세 후 이벽, 정약전 형제들,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베풀고 1785년에는 서울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종교 집회를 갖는 등 신자 공동체를 만들어 이 땅에 천주교회를 설립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박해가 시작되자 집안의 압력으로 천주교 신앙을 배교하고 괴로워했다. 1786년 다시 교회로 돌아왔으며, 결국은 1801년 신유박해로 이가환, 정약용, 홍낙민등과 체포되어 4월 8일 참수되었다. 시신은 선영이 있는 장수동(옛지명: 반주골)에 묻혔다. 1981년 장수동에 안장되었던 성현의 유해는 천진암 한국천주교 창립 선조 묘역으로 이장되어 정약종,권철신,권일신,이벽 옆에 나란히 모셔져 있다.
이승훈 베드로부터 시작된 신앙은 그의 후손들에게도 이어져 셋째 아들 이신규(마티아)를 비롯해 4대에 걸쳐 5명의 순교자를 내었다. 이승훈 묘 아래에는 장남 이택규의 묘와 3남 이신규(마티아)의 묘가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이승훈 베드로 묘소는 지방 문화재 제63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이승훈 역사공원 조성 공사가 진행 중이다.
올 여름에 이승훈 역사공원 조성 공사가 끝나면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승훈은 우리나라 최초의 영세자였지만 동시에 우리나라 최초의 배교자이자 복교자이기도 했다. 그것도 한번이 아닌 세번이나 배교를 했고 금방 다시 번복을 하고 교회로 돌아오곤 했다. 이렇게 배교를 했다는 사실 때문에 이승훈은 교황청 심사에서 떨어져 성인 반열에 오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