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2일(수)
가평군 설악면에서 아버님과 간장게장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찾아간 광암 이벽 요한 세례자 진묘 터
포천시 화현면 공동묘지에서 잠시 방향을 잘못 잡아 헤매다가 진묘 터에 다다랐다.
광암 이벽의 묘는 1979년 2월에 발견되었는데, 그의 유해와 지석은 같은 해 6월 천진암으로 이장되었다.
현재의 묘(포천시 향토유적 제48호)는 이장 이후 조성된 것으로 봉분과 묘비가 남아있다.
포천 출신의 실학자인 초기 천주교도 이벽은 무반 가문 출신으로 일찍부터 서학(천주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정약용, 이승훈 등과 깊은 교유관계를 맺고 경기도 광주의 천진암과 주어사에서 강학회를 열어 서학을 학문에서 종교로 승화시켰다. 정조 8년(1784년) 이승훈 부친이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 이승훈도 함께 가서 세례를 받고 올 것을 부탁하고 그 절차를 가르쳤다. 이승훈이 우리나라 최초로 세례를 받고 돌아오자, 다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아 정식으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1785년 을사 추조 적발 사건이 발생하자 평소 천주교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유림들이 반발하였고, 이벽도 가족들에게 배교를 강요받았다. 집안에 갇혀 천주 신앙과 부모에 대한 효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화현리 집에서 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화현면 화현리에 이벽의 생가이자 순교지를 재현하고 있다.
이벽 생가 복원터에서 출발하여 포천천변의 포천 순교 성지(복자 홍인 레오 순교 터)를 향했다.
복자 홍인은 구읍천이 포천천으로 합류되는 이곳에서 1802년 순교하였다.
한국 천주교회가 1784년 창립되었을 당시 경기도 포천지역에 복음을 전파하고 순교한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과 그의 아들 홍인(레오) 부자의 순교를 기리는 현양비이다.
홍교만은 한양에서 태어났으나 포천으로 이사 와 살면서 40세에 소과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홍교만은 양근에 살고 있던 고종 사촌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우고, 아들 홍인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하지만 홍인은 신앙의 진리를 깨달은 후 부친보다 먼저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후 부친을 입교 권면하여 1794년 주문모 신부에게 부자가 세례를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아버지와 함께 체포되어, 홍교만은 한양 포도청으로 압송되었고 그해 4월 서소문 밖에서 참수를 당했다. 아들 홍인은 10개월간 문초와 형벌을 받고, 이듬해 1월 포천 저자거리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홍교만과 그의 아들 홍인은 2014년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복자품에 올려졌다.
홍인 레오 성지를 관리하는 포천 성당의 언덕 위에 있는 석조 성당
1990년 화재로 목조 바닥과 지붕틀 등이 소실되긴 했지만 한국전쟁 직후에 건축된 석조 성당의 전형적인 의장적 특징(종탑과 뾰족한 아치 창호)과 공간적 특징(단일 홀로 구성된 강당형 평면), 화강석 조적구법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어 등록 문화재 제271호로 지정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많은 교회 건물을 석조로 세웠지만 포천성당은 군부대가 직접 세운 것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물이다.
석조 성당으로 오르는 길에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
1992년에 준공된 현재의 포천 성당
포천 성가정 성당의 성가정상과 성모자상
포천군에 있는 두 곳의 성지를 순례했다.
남들보다 일찍 하느님을 받아들인 신앙 선조들의 가슴 아픈 집안 이야기가 가슴을 찡하게 한다.
천주교를 멀리하기 위해 아들 이벽을 집안에 감금해 아사하게 한 부모의 심정은 어땠을까?
홍부자가 신유박해 때 참수형을 당하였을 때 그들의 가족들은 얼마나 처참했을까?
집안을 궁지에 몰아넣으면서까지 신앙을 지키는 순교자들의 큰 뜻을 나같은 소인이 이해할 수가 있을까?
주님! 우리나라의 순교자들을 위하여 빌어주소서.